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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적도상의 조강포. |
김포문화재단(대표이사 최해왕)은 4월 7일 김포시청 대회의실에서 「김포의 옛 포구(浦口) 종합학술조사」 용역에 대한 최종보고회를 가졌다.
이번 조사는 김포 옛 포구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발굴하고, 한강하구의 관광자원 등과 연계시켜 김포의 대표적인 역사문화관광콘텐츠로 개발하고자 2015년 12월 말부터 추진되었다.
이 날 연구기관인 (재)한울문화재연구원은 고지도, 근대지도 및 일제지적원도 등의 비교와 고문헌, 주민면담 등을 통하여 김포 주요 포구의 위치를 추정하고 포구 일대의 마을규모 등을 분석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김포의 포구는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모아진 세곡을 수도 한양으로 수송하는 조운체계 상 서해를 지나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조세운반선들이 물때를 기다리던 곳이었다. 현재의 모습으로 간척되기 이전에는 내륙 쪽으로도 수많은 물길이 존재하여 「한국수산지」(1908), 「조선지지자료」(1919) 등의 기록을 보면 총30여개에 달하는 포구와 나루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한국수산지」(1908)에는 각 포구의 호수, 인구수, 선박수 등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는데 20세기초 김포에서는 강령포, 조강포, 마근포의 3포가 김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구였다. 특히 조강포는 예로부터 고려시대에는 서해 뱃길로부터 개경(開京)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조선중기에 조강포는 갑곶의 ‘갑곶원(甲串院)’과 함께 ‘조강원(祖江院)’이라는 관영숙박시설까지 있을 정도로 가장 번성한 포구였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포구에 대한 수세권이 중앙에서 궁방(宮房)·아문(衙門)과 같은 기구로 넘어가는 양상이 조강포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날 최종보고회에서 한울문화재연구원은 “규장각 관련도서를 통해 1848년 조강포가 육상궁(毓祥宮: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에 부속되어 매년 백미(白米) 50석(石)과 소금(鹽) 50석(石)을 상납하였고, 조강의 선주(船主)들은 용동궁(龍洞宮:명종의 맏아들 순회 세자의 궁)에 세금을 상납하였던 사실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최해왕 김포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이번 연구용역을 통해 김포가 해안과 강안을 따라 수많은 나루와 포구가 형성되었던 수운교통의 중심지, 물의 도시였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고, 주요 포구들의 위치와 명칭, 규모, 기능 등을 보다 정확히 밝혀 포구의 원형에 한발 짝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앞으로 후속 연구를 통해 주민 구술증언과 포구 관련 역사문화자원 내용 등을 보완할 예정이다. 포구를 비롯한 한강하구의 역사문화자원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내외에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여 우리나라 대표 수로 도시로서의 김포의 이미지정립과 함께 지역의 브랜드 가치 향상을 위해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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