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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김포의 인물

등록날짜 [ 2006년10월15일 00시00분 ]

강 위 빙 (姜渭聘)


선조 2년(1569)~인조 15년(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진주, 자 백상(伯尙), 시호 충렬(忠烈).
선조 36년(1603)에 성균관에 입학한 후 재행(才行)으로써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고,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와 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내고, 광해군(光海君) 때 여러 번 내외직에 있었으나, 국정이 문란함을 한탄하여 사퇴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익찬(翊贊),사어(司禦),청풍군수(淸風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며,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들어가 봉림대군(鳳林大君) 밑에서 군사를 모아 수성(守城)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강을 건너오자 처조카인 이돈오(李惇五)와 윤전(尹),송시영(宋時榮),이시직(李時稷) 등과 같이 사생(死生)을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강위빙은 적병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적병이 칼날을 들이대며 항복시키려 하였으나 위빙은 분연히 꾸짖기를 “내 머리는 끊을지언정 무릎은 굽힐 수 없다.”하니 적병이 그의 혀를 끊어서 죽였다. 또한 이돈오 등도 모두 함께 죽였으니, 다섯 사람이 마침내 그 언약을 저버리지 않은 셈이 되었다.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으며, 순조 때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묘소와 정려는 김포시 풍무동에 있었으나 정려는 현존치 않는다.
저서인 <혜국지(惠局志)>는 규장각 도서로 전해지는 필사본으로, 조선 초기부터 혜민서를 두고 의약을 맡게 하여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했으나 여러 차례의 병란(兵亂)을 거치게 되어 이를 고증할 만한 문헌이 남지 않아서 숙종 45년(1719) 제학(提學) 조태구(趙泰)가 낭관(郞官) 강위빙(姜渭聘)에게 권하여 저술한 책이다. 그 후 영조 23년(1747)에 변태항(卞泰恒)의 아버지가 다듬은 다음, 정조 2년(1778)에 변태항 등이 다시 손을 대어 고쳤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혜국지>는 1874년 강위빙의 6대손 강해수(姜海秀)가 등사(謄寫)하여 자신의 집에 간직했던 책이다. 책 서두에는 이 같은 사정을 알려주는 3인의 서(序),지(識)가 있고, 목록이 있다. 혜민서의 연혁과 식렬(式列),지공(支供),고과(考課) 등 운용에 관한 참고자료이다.

*저서 : 惠局志

권 대 운 (權大運)


광해군 4년(1612)~숙종 25년(1699)
조선 문신, 자는 시회(詩會), 호는 석담(石潭), 본관은 안동(安東), 판서 협(?)의 손, 사어(司禦) 근중(謹中)의 아들.
인조 20년(1642) 진사가 되고 인조 27년(164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이후 지평(持平),헌납(獻納),이조정랑,응교,사간 등의 청요직을 거쳐 승지(承旨)가 되었다. 이후 형조,병조,예조의 참의(參議)와 좌승지(左承旨),통진현감(通津縣監) 등을 지내고, 현종 7년(1666)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대사관,함경도관찰사를 거쳐 현종 11년(1670) 호조판서로 발탁되었으며, 그 뒤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이 되고 찬의금부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현종 15년(1674) 예조판서가 되고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뒤, 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되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영일(迎日)에 부처(付處)된 뒤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그는 유배 중인 서인(西人)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賜死)게 하는 한편 서인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계속했다. 궤장(?杖)을 하사 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러나 숙종 20년(1694)에 남인이 숙종의 폐비인 민씨(閔氏)의 복위 운동을 일으킨 소론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폐비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의 미움을 받아 화를 당하게 되는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삭출(削黜)당한 뒤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
과격파 남인으로 당쟁에 휘말렸으나 생활이 검소하고 청렴하여 명망이 높았는데, 죽고 난 뒤 왕의 특명으로 직첩이 환급되었다.
묘소는 큰 상석(床石)뿐 묘비와 신도비가 없다. 일체의 현각(顯刻)한 것이 없는 것은 당쟁과 사화(士禍)로 인한 후환을 염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고도 하고 심지어 봉분이 전후분으로 된 것이 그 중 하나는 허봉(虛封)이라는 설까지 있다. 또 일설에는 묘갈과 신도비를 배로 싣고 오다가 사세(事勢)가 불리해서 바다에 수장(水葬)했다고도 하는데 이같은 속설들은 당시의 당쟁 사화를 짐작케 한다.

*문헌 : <仁祖實錄>,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樊巖集>, <韓國人名大事典>, <通津縣先生案>, <國朝文科榜目>

권 대 재 (權大載)


광해군 12년(1620)~?
자는 중거(仲車), 호는 소천(蘇川),돈간재(敦艮齋),용문산인(龍門山人)이고 정헌공의 증손 화산부원군 복(復)의 후손이요 남강공(南岡公) 상(常)의 증손이며 진사 위중(偉中)의 아들이다.
효종 4년(1653) 계사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었다가 당후가관(堂後假官)을 지냈다. 효종 9년(1658)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서 병과로 급제, 전적(典籍),병조좌랑(兵曹佐郞),창평현감(昌平縣監),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공주현감(公州縣監),대구판관 등을 역임하고, 숙종 즉위 초에 형조참의(刑曹參議),승지(承旨)를 거쳐 경상도 순무사(巡撫使),전라도 관찰사,대사간,대사헌 등을 거쳤다.
숙종 5년(1679)에 송시열(宋時烈)을 엄중 처벌하려다가 준격(峻激)한 논의로 혼란을 조성한다 하여 광주(光州)로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영변(寧邊)으로 다시 이배되었다가, 숙종 9년(1683)에 몽유(蒙宥)되어 돌아왔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등용되어 제학을 거쳐 호조판서에 이른 뒤, 그 해 4월에 향년 70세로 졸하였다.
공은 생전에 종형인 영의정 대운(大運)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서인의 정권 다툼 결과에 따라 부침과 영욕을 겪었으며, 임종 때에 종형 대운에게 소청하여 임금의 폐비사건을 간하게 하는 등 평생토록 강직한 기절을 지선(至善)으로 여기어 실천하였는데 역행(力行)하였다. 그림에 능하고,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저서 : 讀易手箚, 中庸辨疑, 史林評要, 南爲錄, 光山錄, 龍門錄, 草山錄

권 상 (權 常)


중종 3년(1508)~선조 22년(1589)
조선조 문신, 자는 길재(吉哉), 호는 남강(南岡), 본관은 안동(安東), 전생서 참봉(典牲暑參奉) 진(振)의 아들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송종지절(送終之節)이 어른과 같았으며 효성이 지극했다는 사신의 평이 있다. 장성해서는 어버이를 섬기매 정성을 다하고 그 안색을 살펴 봉양하고 뜻에 승순(承順)하며 힘써 환심(歡心)을 사고자 했다. 따뜻한가 시원한가를 보살펴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집을 나설 때에는 항상 고하고 돌아오면 면알(面謁)하며, 집이 가난하여 거듭 곳간이 비어도 반드시 술과 고기는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공사(公事)가 아니면 일찍이 모친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며, 수저를 집어 드리고 밤에는 금침(衾枕)을 받들었다. 모친의 병환에는 띠를 풀어 옷을 벗고 눕지 않고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으며 중야(中夜)에 목욕하고 관대(冠帶)하고서 향을 피워 하늘에 빌되 호읍(號泣)하며 자기 몸으로 대신하기를 청했다.
모친이 몰하기에 이르러서는 애훼(哀毁)함에 예제(禮制)를 넘었으며 치상(治喪)은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의거해 거행했다. 미음죽과 나물만을 먹되 열장으로 담근 채소나 과일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3년 동안이었다. 여묘(廬墓)를 함에 있어서는 하루에 두 차례씩 묘소에 올라가 곡을 함에 반드시 애달픔을 다하면서 비록 비나 눈이 와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복제(服制)를 벗은 뒤에도 오히려 조석으로 전(奠)을 올리는 것을 시행하여 30년이 되도록 게을리 아니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가묘(家廟)를 참배하였는데 출입할 때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기일(忌日)이 오면 그 한 달을 모두 행소(行素)로 보냈으며 매양 자신의 생일을 맞으면 비애(悲哀)에 빠져 즐거워하지 못했다. 과부가 된 누이동생과 40년을 동거하였는데 의식을 함께 하였으며 그 아이들을 자기 소생과 같이 무육(撫育)하였다.
선조 6년(1573) 용강현령(龍岡縣令)을 역임했다. 선조 16년(1583) 선공감정(繕工監正)에 이르고, 이 해 효행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위계에 올랐다. 80세 때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청주 백록서원(白鹿書院)에 제향되고, 묘소는 김포시 하성면 마조리에 있다.

*문헌 : <宣祖實錄>, <國祖人物考>, <韓國人名大事典>

권 상 (權 常)


중종 3년(1508)~선조 22년(1589)
조선조 문신, 자는 길재(吉哉), 호는 남강(南岡), 본관은 안동(安東), 전생서 참봉(典牲暑參奉) 진(振)의 아들이다.
7세에 아버지를 잃었는데 그 송종지절(送終之節)이 어른과 같았으며 효성이 지극했다는 사신의 평이 있다. 장성해서는 어버이를 섬기매 정성을 다하고 그 안색을 살펴 봉양하고 뜻에 승순(承順)하며 힘써 환심(歡心)을 사고자 했다. 따뜻한가 시원한가를 보살펴 아침저녁으로 문안하고 집을 나설 때에는 항상 고하고 돌아오면 면알(面謁)하며, 집이 가난하여 거듭 곳간이 비어도 반드시 술과 고기는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공사(公事)가 아니면 일찍이 모친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으며, 수저를 집어 드리고 밤에는 금침(衾枕)을 받들었다. 모친의 병환에는 띠를 풀어 옷을 벗고 눕지 않고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했으며 중야(中夜)에 목욕하고 관대(冠帶)하고서 향을 피워 하늘에 빌되 호읍(號泣)하며 자기 몸으로 대신하기를 청했다.
모친이 몰하기에 이르러서는 애훼(哀毁)함에 예제(禮制)를 넘었으며 치상(治喪)은 한결같이 예문(禮文)에 의거해 거행했다. 미음죽과 나물만을 먹되 열장으로 담근 채소나 과일을 입에 넣지 않은 것이 3년 동안이었다. 여묘(廬墓)를 함에 있어서는 하루에 두 차례씩 묘소에 올라가 곡을 함에 반드시 애달픔을 다하면서 비록 비나 눈이 와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복제(服制)를 벗은 뒤에도 오히려 조석으로 전(奠)을 올리는 것을 시행하여 30년이 되도록 게을리 아니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가묘(家廟)를 참배하였는데 출입할 때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기일(忌日)이 오면 그 한 달을 모두 행소(行素)로 보냈으며 매양 자신의 생일을 맞으면 비애(悲哀)에 빠져 즐거워하지 못했다. 과부가 된 누이동생과 40년을 동거하였는데 의식을 함께 하였으며 그 아이들을 자기 소생과 같이 무육(撫育)하였다.
선조 6년(1573) 용강현령(龍岡縣令)을 역임했다. 선조 16년(1583) 선공감정(繕工監正)에 이르고, 이 해 효행으로 천거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위계에 올랐다. 80세 때 노인직(老人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청주 백록서원(白鹿書院)에 제향되고, 묘소는 김포시 하성면 마조리에 있다.

*문헌 : <宣祖實錄>, <國祖人物考>, <韓國人名大事典>

권 상 하 (權尙夏)

인조 19년(1641) ~경종 1년(1721)
조선조 학자,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본관은 안동, 집의(執義) 격(格)의 아들, 호는 문순(文純)이다.

1. 생 애
(1) 당쟁과 처신
현종 1년(1660) 진사(進士)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던 중, 1668년에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숙종 1년(1674)에는 1659년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 : 仁祖繼妃趙氏)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송시열이 숙종 1년(1675) 추죄(追罪)를 받아 덕원부(德源府)에 유배되고 남인들이 득세하게 되자 관계 진출을 단념하고 청풍(淸風)의 산중에 은거하여 학문 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고 사사(賜死)되자 유배지에 달려가 이별을 고하고 의복과 서적 등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숙종 18년(1692) 김포군수(金浦郡守)에 부임, 이듬해 사직했다.
숙종 30년(1704) 숙종의 뜻을 받들어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향하고 1717년 스승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숙종(肅宗)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이이(李珥)를 조종(祖宗)으로 하여 송시열에게 계승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지도자였다.

(2) 기호학자(記號學者)의 계승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자가 많았으나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뒤에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그와 같은 학문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치의 소용돌이에 관련되기도 하였다.
1715년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윤휴(尹)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생 유규(柳奎) 등 8백여 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붕당기에 살면서도 정치현실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문제에 대하여 성리학 자체의 학적 체계나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를 새로이 검토하여 보다 철저히 규명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정립된 이황,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호락논변(湖洛論辨)을 학파적 성격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 예학적 학문이론 활성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인 호락논변(湖洛論辯)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이다.’ 라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이론(理通氣局理論)을 들어 전통적 기호학파의 학설로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의 상이론을 주장한 그 발상은 본성을 후천적인 것, 즉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리할 수 있는 것임을 주장하여 동물성으로부터 분별, 보호하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하여 구체적인 사회규범으로서 경직되어가는 학문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하겠다.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金昌協)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특출한 제자로는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작품으로 <기백이태연표(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副司果李塾表)> 등이 전한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다.

2. 저서 및 활동
《한수재집(寒水齋集)》
권상하(權尙夏)의 시문집. 목판본. 35권 15책. 문인 윤봉구(尹鳳九)의 서문이 있다. 저자가 죽은 후 손자 정성(定性)이 모은 유고를 제자인 한원진(韓元震),윤봉구 등이 편집하고, 영조 37년(1761)에 외증손 황인검(黃仁儉)이 증손 진응(震應)과 함께 간행했다. 1978년에 조룡승(曺龍承)이 영인본으로 간행하였다.
내용은 시(詩),소(疎),서(書),잡저(雜著),통문(通文),정문(呈文),어록(語錄),서(序),기(記),제발(題跋),찬(讚),제문(祭文),고문(告文),축문(祝文),애사(哀詞),신도비(神道碑),정비(庭碑),묘갈(墓碣),묘지(墓誌),묘표(墓表),행장 등을 수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서(書)가 가장 많은 분량(권4에서 권20까지)을 차지하고 있고, 묘갈,제문류가 그 다음으로 많다. 서는 주로 답서(答書)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통(道統) 유림의 시의(時議), 이기 심성론, 유교경전에 관한 것 등 주로 성리학의 이론에 관한 논의가 핵심을 이루고 있고, 또 복식이나 예제를 다룬 글도 있다.
그의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에게 올린 글에서부터 한원진,이간(李柬),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後),성만징(成晩徵) 등 소위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과의 서신은 율곡과 우암을 잇는 기호학파 지도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권21 잡저 중 태극도설시사제계문 겸 시현석(太極圖說示舍弟季文兼示玄石)은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과 ‘각구일태극(各具一太極)’의 의미를 밝힌 글이다. 논성설(論性說)은 성에 관한 논의를 일원(一原),분수(分殊),분수지분수(分殊之分殊)의 세 가지 층차로 구분하고, 당시의 학자들이 분수의 층차에서 논의한 성을 알지 못함을 비판하고 있다.
사칠호발변(四七互發辨)에서 그는 “율곡 선생은 ‘발하는 것은 기(氣)요, 발하는 소이는 이(理)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깊이 음미하면 퇴계의 호발설을 변정(辨正)할 수 있다”라고 하여 이기사칠론에서 율곡설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숭현서원통론중외문(崇賢書院通論中外文)은 송시열을 봉향할 때 올린 통문이며, 화양어록(華陽語錄)은 송시열의 어록이요, 기사행중어록(己巳行中語錄)은 기사환국 때에 남인에 의해 우암이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장차 죽게 되었을 때에 한 말을 기록한 것이요, 초산어록(楚山語錄)은 우암이 사사되었을 때 그에게 도통을 이어 주고 후사를 부탁한 말들을 기록한 것으로서 “천지가 만물을 생하는 것이나,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것, 그리고 공자와 맹자 이후로 서로 전하는 것이 하나의 ‘직(直)’임”을 밝히고 있다. 또, 시,서 다음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묘갈이나 제문류는 노론계 인사에 관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학계와 정계에서의 그의 위상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 문집은 조선 후기 유학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특히, 조선 성리학사의 주요 논쟁인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과 관련한 호락논쟁이 그의 문인인 한원진과 이간 사이에서 발단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하는 한원진을 지지함으로써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을 주장하는 이간과 맞서게 되었다.

《만동묘》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을 제사지내기 위해, 숙종 30년(1704) 충북 괴산군 청천면(靑川面) 화양동(華陽洞)에 지은 사당.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4대 서원으로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만동묘정비(지방기념물 25호)만 남아 있다.
인조 때 송시열(宋時烈)이 명나라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는 글 한 폭을 받고서 이 글을 화양동 석벽(石壁)에 새겨 놓고 석벽 위에 공부하는 사당을 지었는데, 송시열이 죽을 때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에게 이곳에 묘우(廟宇)를 지어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도록 하여 권상하가 유림을 동원하여 지은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 묘에 딸린 전토(田土)와 노비를 주었고, 영조 때에는 묘를 중수하였으며 면세전(免稅田) 20결(結)을 주었다. 순조 9년(1809)에는 묘우를 개축하고 헌종 10년(1844)에는 정식으로 봄과 가을에 한 번씩 관찰사가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 묘는 노론(老論)의 소굴이 되어 상소와 비판을 일삼았고,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양민을 토색하는 등 민폐가 심하여,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헐어버리고 신주와 편액(扁額) 등은 서울 대보단(大報壇)의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겼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고종 11년(1874) 다시 세웠으나 일제 강점기에도 유생들이 모여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므로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하였다.

《기호학파(畿湖學派)》
원래 기호지방은 경기도와 호서지방,해서지방을 포괄하는 지역을 의미하지만, 역사적 개념에서 기호학파는 경기도,충청도 지역의 이이,성혼의 문인과 학자들의 집단을 지칭한다.
조선 전기에 영남지방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왕조교체에 불만을 품고 은거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일단의 학자군이 형성되고, 조선 중기에 이황(李滉)이 배출되면서 영남학파가 성립되었지만 기호학파는 넓은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학문적 결속력이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조 후기에 동서붕당이 형성되고 영남학파의 다수가 동인이 되면서 이에 대항하는 서인세력이 기호지역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 볼 때 기호학파는 서인의 주축을 형성했지만, 서경덕(徐敬德)처럼 기호지방(개성)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북인(北人)으로 나간 인물들이 있음을 고려할 때, 기호학파가 정치적으로 곧 서인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기호학파를 성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는 이이,성혼,송익필(宋翼弼)을 들 수 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기호학파의 세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특히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을 거쳐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서는 연산(連山),회덕(懷德) 등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기호학파는 정계,학계의 주도권을 차지하였다. 기호학파가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데는 무엇보다도 서울에 지역적으로 근접해 있다는 이점이 많이 작용하였다.
숙종 대에 이르면 기호학파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회덕을 중심으로 한 송시열 계열은 노론이 되고, 이산(泥山)을 중심으로 한 윤증(尹拯) 계열은 소론으로 분립되었다. 기호학파는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등의 성리설과 예학 등에서 많은 학문적 성과를 남겼는데, 특히 송익필,김장생,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예학은 현종 대에 남인과 맞서 극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을 일으키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3.작 품
여기서는 시 두 편을 소개한다.
- 제민루(濟民樓) -
영남 땅의 좋은 경치 제민루라 이름한 곳
천고의 시인 묵객 몇몇이나 노닐었나
십리 훤한 호수 옥 거울이 열리었고
두세 가락 긴 젓대 맑은 가을 보내오네
천애(天涯)의 나그네는 황화 백주 즐기고
성 밖의 모래톱은 홍수 청산 고와라
나팔 울린 관가 문에 사람들은 흩어지고
둥근달이 옮겨와 학봉 머리에 두둥실


- 꿈을 깨고서[記夢] -
고요한 텅빈 집에 하는 일 없어
낮잠 들어 그대로 꿈을 꾸었네
조각배를 타고서 푸른 바다를 건너
신청동에 뱃줄을 매놓은 뒤에
풍채 좋은 백발의 노인 나타나
이름은 한중이라 말을 하고서
나에게 한 잔 술을 따라 권하고
나에게 두 마리의 봉황 태웠네
옥황상제 명이라고 또렷하게 말하고서
벽도화를 내려주며 아스라이 전송했네
꿈을 깨니 창 앞에는 기운 햇살뿐인데
시름 생각 호호망망 혜계옹 속일레라

*저서 : 寒水齋集, 三書輯疑
*문헌 :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韓國人名大事典>

권 협


명종 8년(1553)~광해군 10년(1618)
조선조 문신,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본관은 안동,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상(常)의 아들로, 김포시 하성면 마조리에서 성장했다.
종실 순천군(順天君) 이관(李琯)에게 수학하고 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춘추관(春秋館), 통진현감(通津縣監) 등의 벼슬을 거쳤다. 선조 22년(1589) 각 도에 괴질(怪疾)이 발생하자 함경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돌보고 제사를 올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장령으로서 서울을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였다.
선조 29년(1596) 교리(敎理), 시강관(侍講官), 이듬해 응교(應敎)로 정유재란(丁酉再亂)을 맞아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사행(使行), 구원병 요청에 성공했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 이정(李楨)이 우리나라의 지세를 알고자 하므로,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보병과 수군을 얻고 군량을 조달하게 했다.
돌아와 예조, 호조참판(參判), 황해감사,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길창군(吉昌君)으로 봉해지고, 선조 40년(1607) 예조판서에 이르고 광해군 때는 관직으로 버리고 두문불출했다.
손자 권대운(權大運)이 지은 가장(家狀)이 있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 정랑(正郞) 수(洙)의 딸이고 묘소는 경기도 부천군(富川郡) 계남면(桂南面) 궁리(宮里)에 계좌(癸坐)로 합폄되어 있는데 계하(階下)에 자손들이 계장(繼葬)되어 있고 묘도(墓道) 입구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곳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은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어 구로구(九老區)의 궁동(宮洞)이 되어 있다. 문형(文衡)이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공의 신도비문을 짓고 좌의정 미수(眉?) 허목(許穆)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손자인 영의정 대운(大運)은 공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문헌 : <宣祖實錄>, <國朝榜目>, <韓國人名大事典>

권 환 (權 環)


인조 14년(1636)~숙종 42년(1716)
자는 중장(中章), 호는 제남(濟南)이다. 정헌공계 화산부원군 복(復)의 후손으로 남강공(南岡公) 상(常)의 현손이요 충정공(忠貞公) 협(?)의 증손이며, 도정공(都正公) 대윤(大胤)의 둘째 아들이다.
미수(眉?) 허목(許穆)에게서 배웠으며 효종 8년(1657)에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현종 9년(1668)에 문과에 양도장원(兩度壯元)한 후 교리,전랑(銓郞 : 이조정랑),응교를 거쳐 관서(關西) 및 영남 지방 어사, 북평사(北評事 : 북평역에 딸린 정6품직 문관)가 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개성유수(開城留守)를 지내고 공조와 병조의 참판을 거쳐 도승지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대사성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숙종 15년(1689)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왕후 민씨(閔氏)가 폐위되었는데, 이때 왕후 폐위가 불가하다고 상소하여 왕의 분노를 산 오두인(吳斗寅) 등을 공이 대사간직에 있으면서 소계(疎啓)하여 구해 주기도 하였다. 81세로 졸하기까지 직절(直節)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유집(遺集) 9권이 있다.
묘소는 경기 부천 동면(東面) 계양산(桂陽山) 동쪽의 임학동(林鶴洞)에 해좌로 있으며 배위는 중 정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 도사(都事) 상건(象乾)의 딸인데 인조 14년(1636)에 태어나 1남 1녀를 생육하고 현종 4년(1663) 정월 9일에 졸하였다. 계배는 중 정부인 순천 김씨(順天金氏) 현감 두명(斗明)의 딸인데 3남 3녀를 생육하였으며 기일은 11월 29일이다. 아들은 참봉 응경(應經),헌경(憲經),덕경(德經),문과 전적 무경(懋經)이 있다.

*저서 : 濟南集
*문헌 :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文科榜目>, <韓國人名大事典>, <金陵郡誌>

권 황 (權 愰)


중종 38년(1543)~인조 19년(1641)
자는 사영(思瑩), 호는 치암(恥菴)이며 상(常)의 둘째 아들이다.
순천군 이관(李琯)의 문하에서 배워 선조 9년(1576)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寺)가 된 후 형조,호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모부인을 강화도로 모시어 피난하였고, 인조 2년(1624)에는 친상을 당하여 예에 따라 집상(執喪)을 하였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책봉되었으며,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등의 내직과 4군(君)의 수령으로 재임할 때에는 청백리(淸白吏)로 모든 사람의 존모를 크게 받았다. 그러나 광해주의 난정으로 사직하고 일시 은둔하여 두 아우인 참판 희(憘),판서 협(?)을 상대로 담락(湛樂)한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1623년 계해에 인조개옥(仁祖改玉)이 이루어지자, 공은 80노령에 용양위(龍?衛) 부호군(副護君)이 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그리고, 왕으로부터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는 등, 조정의 원로로서 노구를 쉬지 않았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에는 전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도성이 함락되어 신변이 위태로웠는데, 성만 바라보며 규호하던 상황에서 다행히 천운이 있어 혹자의 의선(艤船 : 대기선)에 구조되어 화를 면하였다. 당시의 일이 <대동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공이 일찍이 마전 현감(縣監)으로 재직 중 사형수가 십수 명이 있었는데, 은혜를 베풀어 모두 석방한 일이 있었다. 그 후 병자년에 호란이 일어나 가족들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도성이 함락되매 피난민들이 진두(津頭)에 운집하게 되었다. 공은 도성만 바라보며 규호(叫號)할 뿐 다른 계책이 없었다. 그 환란 중에 어느 사람이 찾아와 공을 이끌어 나가기에 가족들이 전부 따라가 보니, 한 곳에 의선이 있었다. 공이 물으니 그 사람이 답하기를, “저는 전에 마전옥의 사형수였습니다. 수령님의 은덕으로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으므로 저는 죽기를 각오하고 재생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이곳까지 와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이렇듯 공은 내우외환에 피화됨이 없이 99세로 천수를 누리고 졸하니, 당시 밤에도 광기가 있어 며칠 동안이나 뜰을 밝혔다고 한다. 부고를 받은 인조는 사람을 보내어 후히 치제(致祭)하였으며, 증직으로 좌찬성(左贊成)을 내렸다.

권 희 (權 憘)


명종 2년(1547)~인종 2년(1624)
조선 문신, 자는 사열(思悅), 호는 남악(南岳), 본관은 안동,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상(常)의 아들이고 협(?)의 아우로, 김포시 하성면 마조리에서 성장했다.
선조 1년(1568) 진사가 되고, 선조 17년(158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주서(注書), 전적(典籍)을 거쳐 각 조(曺)의 낭관(郎官), 양사(兩司)의 벼슬을 역임했다. 선조 25년(1592)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평안도로 피난할 때 역대 왕의 신주(神主)와 어보(御寶)를 안전하게 모시고 행재소에 도착, 난후에 종묘의 전례(典禮)를 모두 복구할 수 있게 했다.
선조 29년(1596) 종부사정(宗簿寺正) 겸 집의(執義)로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사행하고 귀국 후,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선조 36년(1603)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황해도, 충청도관찰사, 강화유수, 금산군수, 광주목사를 지냈다. 1597년 정유에 안동 태사묘(太師廟)를 성배하고, 남악기(南岳記)를 지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의 묘소는 안동부(安東府) 서후면(西後面) 검제(黔堤)의 천등산(天燈山)에 있으니 부(府)로부터 20여 리 상거(相距)한 곳이다. 정유년 겨울에 희(憘)가 명나라 장수 이방춘(李芳春) 부총병(副總兵)의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이곳 부사(府司)에 이르러 곧 주과(酒果)를 갖추고 제문(祭文)을 지어가지고 공의 묘소를 성배하였더니 묘 아래 수리허(藪里許)에 거주하는 권씨성의 지방민 십여 인이 와서 참사하였다. 묘 옆에는 큰 사찰이 있는데, 이것이 곧 봉정사(鳳停寺)라 하는 절이다.”조선시대?
황해도감사를 역임하면서 도내의 백성들이 흉년으로 기근이 든 것을 염려하여 풍년이 든 호남지방의 곡식을 수송하여 도민에게 나누어주고 종자도 나누어주어 기일 안에 뿌릴 수 있도록 조정에 건의하였다.
임진왜란 때 왕실의 신주를 모신 공으로 인조 2년(1624)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호성(扈聖),선무(宣武)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사후(死後)에 우의정을 추증(追贈)했다. 숙종 6년(1680)에 의정부에서 계청함에 공에게 특별히 추훈(追勳)으로 봉군(封君)을 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의논하도록 하교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헌 : <宣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金浦郡誌>, <韓國人名大事典>

경 의 (金敬義)


세조 7년(1461)~중종 27년(1532)
자는 의지(宜之). 어려서 부지런히 배우고 총명(聰明) 강건(强健)하고 지대(志大) 염직(廉直)하여 충효로써 염(念)을 삼았다. 부친 상복을 마치자 친당(親堂)이 강건한 재목이니 활쏘기를 익히면 공(功)을 이룸이 빠르리라 권하니 스스로 책을 끼고 무(武)를 익혀도 된다 하고 <논어(論語)>,<맹자(孟子)>,<춘추(春秋)>,<십구사략(十九史略)>,<장감(將鑑)> 읽기를 좋아하여 널리 살피고 초학(初學)으로 초시에 무재(武才)로 응하였으나 모든 시험마다 부중(不中)되어 사람들이 무재가 탁월하나 마침내 이기지 못하고 굴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평안도 절도사가 부임할 때 별군관(別軍官)으로 계청(啓請) 대행(帶行)하니 마침내 피인(彼人)을 사로잡아 군공(軍功) 일등에 뽑혀 빼어난 지질을 다하였다.
연산군 3년(14989)에 평안도 방산진(方山鎭)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가 되었고, 정덕(正德) 원년에 은율현감(殷栗縣監)에 제수 되었고, 그 해에 병충분의(秉忠奮義) 결책익운정국공신(決策翊運靖國功臣)에 참여되어 가선(嘉善)에 오르고 지산군(支山君)에 봉하여졌다.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官)을 겸할 때 대간(臺諫)이 여러 번 계(啓)를 올려 김모(金某)는 부통관의 임부가 불합(不合)하다 하나 모두 윤허하지 않으셨다. 뒤에 아래에서 그 계를 논의할 때 유순(柳洵)이 말하기를 김모(金某)의 사람됨은 청간(請簡)하여 은율에서 일임(一任)할 때 유애(遺愛)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리고 살펴 헤아림을 만났다 하고 성희안(成希顔)이 말하기를 김모(金某)는 사람됨이 청간하여 은율에서 자못 정성(政聲)이 있었으며 또한 공신이 되어 이품(二品)에 올랐으니 그 전(典)으로 하면 금병(禁兵)에 무슨 불가함이 있으랴 하였다. 유내가 말하기를 김모(金某)를 모두 청간하다 말하고 또한 과실이 없으니 바꾸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고 유순정(柳順汀), 홍경주(洪景舟)가 같은 말로 계(啓)를 올리니 윤허에 의하여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니 간원(諫院)에서 또 자리 바꾸기를 청하였다. 전교(傳敎)에 의하면 김모(金某)는 일찍이 수령이 되어 그 직무를 잘하였고 인품을 갖추어 어질며 친히 공신이 되어 위(位)가 이품(二品)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이미 부총관을 바꾸었는데 또 목사를 바꾸라 하면 곧 이는 끝내 수령을 폐하는 것이라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뒤에 경상우도(慶尙友道) 조방장(助防將)에 제수되어 부임에 나가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함안군수(咸安郡守)를 제수 받고 임기가 차 바뀐 지 한 달을 넘어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제수 받았으나 질병으로써 사직을 하였고 경주목사(慶州牧使)에도 제수 되었으나 역시 질병으로 사직하였다.
상(上)의 요청이 있고 대간(臺諫)에서 게를 올려 질병으로써 의탁하여 사양하다가 결국 부임하여 임기가 차기도 전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모든 외임(外任) 주군(州郡)에 다 염간(廉簡)하다 칭하였다. 증(贈) 자헌대부(自獻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되었다. 묘는 김포시 고촌면에 있으며 지산군파 후손들이 시향을 모시고 있다.

 

김 덕 원 (金德遠)


인조 12년(1634)~숙종 30년(1704)
조선조 문신, 자는 자장(子長), 호는 휴곡(休谷), 본관은 원주(原州), 판관(判官), 인문(仁文)의 아들.
효종 5년(1654) 진사(進士), 현종 3년(1662)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급제,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현종 연간에는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을 역임하면서 언관(言官)으로 활약하였다.
166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급제. 전적(典籍), 지평(持平),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뒤에 형조, 호조판서, 숙종 15년(1689) 우의정을 역임했다. <현종실록> 개수의 주장에 앞장섰고, 복제논쟁은 허목의 설을 따랐다. 뛰어난 재주와 원만한 성품이 숙종에게 인정되어, 서인정권이 들어서고 모든 남인이 제거될 때에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숙종 20년(1694) 갑술옥사(甲戌獄事)에 제주에 유배, 숙종 22년(1699) 풀려 나와 양천에서 죽었다.
묘에서 출토된 의복은 보물 제672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토된 옷들은 모두 비단 ,명주로 짰으며 옷의 종류는 창의(?衣),직령(直領),철릭,답호,저고리,바지,치마,이불,넓은띠,토수(吐手),복건(巾),옷감 등이다. 지정된 옷은 50종류이다.

*문헌 :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星湖文集>, <韓國人名大事典>

김 도 연 (金度演)


고종 31년(1894)~1967
정치가, 독립운동가, 호는 상산(常山)이고 김포(현 양천구 염리동) 출신이다. 1913년 일본 금성 중학교(錦城中學校)를 졸업, 1919년 게이오대학 이재학부(慶應大學理財學部)를 수료했다.

1. 생 애
1915년 말, 겉으로는 학술 연구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비밀항일 결사인 조선학회(朝鮮學會)에 가입하고, 1918년 1월 간부 개선 때 서기(書記)로 피선, 1919년 1월 6일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주체로 웅변대회를 가장, 독립운동 방법을 숙의하고 그 대표의원의 한 사람으로 피선, 2월 8일 재일본 동경조선청년독립단(在日本東京朝鮮靑年獨立團)의 일원으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경찰에 체포돼 9개월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7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931년 아메리칸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취임했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봄 출감했다.
광복 후 우파(右派) 진영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총무로 정계에 투신, 1946년 2월 미군정 하에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에 위촉되고,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민선). 1948년 5월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재경분과위원장(財經分科委員長)에 피선되고, 8월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재무장관에 취임, 한.미 경제협정 교섭 시 한국 측 대표로 활약했다. 1954년 민주국민당 최고의원으로 3대 국회에 진출, 1955년 민주당 고문에 추대, 4.5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국회 부의장에 피선됐다.
4.19혁명 후 8월 국무총리 지명에 실패, 11월 민주당(民主黨) 구파(舊派) 동지들을 규합, 신민당(新民黨) 위원장이 되었으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직 상실,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민중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1965년 8월 한.일 협정의 국회비준에 반대, 의원직을 사퇴했다. 저서로는 자서전인 <나의 인생백서>, <한국농촌경제> 등이 있다. 1964년 독립운동 당시의 공을 기려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활동 조직
(1) 한국민주당
1945년 8.15광복 후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보수세력이 집결하여 창당한 정당.
초기에는 중국의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그 법통을 옹호하였으나, 점차 이승만의 ‘단정(單政) 주장’과 임시정부측의 ‘단정 반대’로 정치적 의견과 노선이 갈라지자 이승만(李承晩)의 단정론을 지지,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태도를 바꾸었다. 그 후 단정인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하여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나 이승만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스스로 야당화하였다.
1945년 9월 6일 여운형(呂運亨)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고려민주당, 조선민주당, 한국국민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환영 국민대회 등 민족주의 민주세력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들은 민족진영의 모든 세력을 하나로 통합할 것에 합의하고,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영수로서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을 추대하고 당수(黨首)격인 수석총무에 송진우(宋鎭禹)를 선정하였다. 그 외 각 부서에 당시 대다수의 민족지도자들이 배치됨으로써 어떤 정치단체보다도 유수한 민족주의 민주세력들이 총집결되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우익 민족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미군정에 적극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미군정의 여당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 후 이승만의 단정 추진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크게 활약하였으며, 5.10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끌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55명에 이어 두 번째인 29명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치활동 면에서는 오히려 한민당이 주도권을 잡아, 한민당이 미리 법학자 유진오(兪鎭午)로 하여금 기초하게 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토대로 헌법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마무리 단계에서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중심제 헌법으로 변경되면서 이승만과의 심각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정부수립을 위한 초대 조각인선에 한민당이 소외되면서 이승만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한편 한민당은 5.10총선거를 거치면서 당세가 위축되자 소장파 의원들과의 대립으로 인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당의 기본 정치목표의 하나인 내각책임제에 의한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서는 동조 정치세력을 규합, 헌법개정을 통하여 그를 성취해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독립당 당원이던 ‘대한국민회’의 신익희(申翼熙) 세력과 ‘대동청년단’의 지청천(池靑天) 세력을 규합하여 1949년 2월 10일 한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였다. 그 후 한민당 세력은 여러 차례의 이합집산과 우여곡절을 거듭하면서 민주국민당, 민주당, 신민당, 민중당, 민정당, 신한당 등으로 변천하면서 한국정당사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민당은 한국의 지주계층, 자산가 및 지성인들이 주축이 된 정당으로서 자연히 그 이념과 성격은 보수적이며 민족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돌아오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 그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의 수립을 통한 조국의 정통성 있는 정부수립과 건국을 당면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창당대회에서의 결의문을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의 결정체이고, 현재 국제적으로 승인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소위 정권을 참칭(僭稱)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여하한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단정 수립 문제를 놓고 임정계통과 정치적 견해가 달라짐에 따라 한민당은 임정 지지의 노선을 버리고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지지, 적극 참여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민당의 정강(政綱)은 자주독립국가의 기약,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 민족문화의 앙양과 세계문화에의 공헌, 국제헌장의 준수와 세계평화의 확립 기약 등 한국 헌법의 기본방향을 정강으로 채택하였다.
(2)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南朝鮮大韓國民代表民主議院)
1946년 한국에 설립된 미군정청의 자문기관.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최로 소집된 비상국민회의는 최고정무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구성을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 3인에게 일임하여 28명의 최고정무위원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본래의 성격과 명칭을 바꾸어 ‘민주의원’이라 하였다.
주한 미군사령관인 중장 J.R.하지의 자문기관으로, 과도정부 수립을 촉진하는 사명과 한국의 완전독립을 조속히 실현하는데 공헌하기 위해 2월 14일 개원하였다. 조직은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김규식이었으나, 2월 23일 민주의원 규범 32개조에 따라 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규식, 총리 김구, 비서국장 윤치영(尹致暎), 서무국장 고희동(高羲東), 공보국장 함상훈(咸尙勳), 통계국장 조종구(趙鍾九), 기획국장 최익(崔益)이 되었다.
회의는 매주 3회(화,목,토) 창덕궁에서 개최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관해 제반문제를 검토하고 모든 우익 세력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할 안건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그 동안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전개하던 우익 진영은 분열되었다. 그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자, 이승만 중심세력에 의한 남한단독정부수립추진운동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간파 세력들에 의한 좌우합작운동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촉진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추진하는 두 갈래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세변화와 더불어 1946년 12월 12일 미군정청에 의해서 설립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개원되면서 비상국민회의와 그 후신인 민주의원의 기능은 실질적으로 상실되었다. 민주의원의 성격은 결의기관이 아닌 미군정장관의 자문기관에 지나지 않아 활동에 한계가 있었으며, 좌익 세력의 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대립하였다. 또한 미군정의 자문기관에 지나지 않았는데, 미군정의 의도와는 달리 의원들은 정권인수를 위한 국민대표기관으로 인식하였다.
(3) 남조선 과도입법위원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로 들어가자 미군정은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 등 온건한 좌우 양파의 지도자들에게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하도록 이를 적극적으로 주선하였다. 한편, 군정장관 A.L.러치는 한국인이 요구하는 법령을 한국인 스스로가 제정하는 입법기관 창설을 주한 미군사령관인 중장 J.R.하지에게 건의하여 동의를 얻어 8월 24일 군정법령 제118호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 제1,2조에서 “입법의원은 모스크바삼상회의 협정(모스크바협정)에 의거한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개혁의 기초로 사용될 법령 초안을 작성한다”고 목적을 천명하였으나,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되고 국내 정계가 매우 혼란한 상태였으므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설, 중추원 재판설, 통일정부 지연설, 군정 연장설 또는 합리화설, 국민의회의 법통무시설 등 창설에 대한 비난이 매우 심하였다.
법령에 따라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45명은 간접적인 민선으로, 45명은 하지가 임명한 관선으로 총 90여 명의 입법의원이 선출되었고, 1946년 12월 12일 개원하였다. 원래 11월 개원할 예정이었으나 좌우합작위원회가 부정선거와 친일파 등장을 문제삼아 서울과 강원도 선거가 무효가 되어 재선거를 실시하여 1개월 지연되었다.
의장에 김규식, 부의장에 최동오(崔東旿),윤기섭(尹琦燮)이 선출되었고, 8개의 상임위원회(법무사법위원회,내무경찰위원회,재정경제위원회,산업노동위원회,외무국방위원회,문교후생위원회,운수체신위원회,청원징계위원회)와 6개의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각각 관계법안을 제정,통과시켰다. 1948년 5월 19일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12호로 해산되기까지 공포한 법률은 11건, 심의한 법률이 50여 건이었으나, 입법의원을 거치지 않고 군정법령으로 공포된 것이 80건에 달한 점 등을 볼 때 당시의 입법의원은 입법부로서의 준비단계 임무를 수행한 데 불과하였다.
또한 입법의원에서 제정한 법령은 군정장관이 동의해야 효력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국회의 기능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입법의원에서 통과한 중요 법령은 하곡수집법,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 사찰령 폐지에 관한 법령, 미국수집령 등이다.
(4) 민주당
1955년 자유당의 사사오입개헌을 계기로 반(反)이승만 보수세력이 모여서 만든 정당으로서, 민주국민당(약칭 민국당)을 모체로 하고 흥사단계열, 자유당 탈당의원, 제2대 국회 말기의 무소속 구락부 등의 범야세력을 규합하여 그 해 9월 18일 창당하였다.
초대 대표최고위원은 신익희(申翼熙), 최고위원은 장면(張勉),조병옥(趙炳玉),곽상훈(郭尙勳),백남훈(白南薰) 등이었다. 창당 초기부터 강력한 야당으로서 호헌투쟁을 전개하고 지방조직에 힘써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후보자를 지명하였다. 5월 5일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급서(急逝)하여 큰 타격을 받았으나 장면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고 계속 자유당과 투쟁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여당인 자유당이 126석을 차지한 가운데 민주당이 76석을 차지하여 호헌선을 유지하였으며, 특히 도시에서 승리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는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급서와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로 말미암아 패배하였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자유당이 무너진 후 7월 선거에서 3분의 2를 넘는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에 윤보선(尹潽善)이 선출되고 국무총리에 장면이 인준됨으로써 민주당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집권 이후 고질적인 신구파(新舊派)간의 파쟁 끝에 10월 18일 구파가 신민당으로 떨어져 나갔다. 민주당은 표면상 원내 안정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다시 노장파,소장파,합작파,중도파의 분쟁이 심화되어 행정력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민주당 정부는 집권 후 약 9개월 동안 4번이나 개각을 단행하였으나 뜻대로 정국안정을 실현하지 못한 채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해산되었다.
1963년 1월 정치규제가 풀리자 7월 18일 박순천(朴順天)을 당총재로 하여 민주당이 재건되었다. 그러나 11월 26일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13석을 얻어 원내 제2야당이 되었다. 1964년 10월 국민의 당을 흡수하고, 1965년 6월 14일 원내 제1야당인 민정당과 합당하여 민중당을 창당함으로써 해소되었다.

*저서 : 나의 인생 백서, 한국농촌경제
*문헌 : <獨立運動史>, <抗日學生民族運動史硏究>,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김 매 순 (金邁淳)


영조 52년(1776)~헌종 6년(1840)
조선의 학자, 자는 덕수(德?), 호는 대산(臺山), 본관은 안동, 창흡(昌翕)의 4대손, 군수(郡守) 범행(範行)의 손자.

1. 생 애
정조 19년(179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검렬(檢閱), 사인(舍人)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고, 예조참판, 강화부 유수(留守) 등을 역임했다. 문장은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당대 으뜸으로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특히 그가 지은 삼한의열녀전서(三韓義烈女傳序)는 천고의 절조(絶調)라고 칭송되었다. 학문은 한원진(韓元震)의 학설을 지지, 호론(湖論)에 속했으며, 덕행으로 저명했다. 고종(高宗) 때 판서에 추증,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2. 주요 저서
《대산집(臺山集)》
활자본. 20권 10책. 문인인 김상현(金尙鉉)이 유신환(兪莘煥)과 함께 교정한 것을, 고종 16년(1879) 아들 김선근(金善根)이 간행하였다.
권1~3은 부(賦),시(詩), 권4는 소차(疏箚),계사(啓辭), 권5~6은 서(書), 권7은 서(序),기(記), 권8은 제발(題跋), 권9는 잡저(雜著), 권10~12는 묘지(墓誌),묘갈(墓碣),묘표(墓表),비(碑),행장(行狀),제문(祭文), 권13~14는 가사(家史), 권15~20은 궐여산필(闕餘散筆) 등이다. 가사는 직계,외계,방계의 3전(三傳)으로 나누어 저자의 내외조선(內外祖先)에 대한 전기를 기록한 것이고, 궐여산필은 저자가 여러 책을 읽고 선배에게 견문한 내용 및 의심나는 대목을 논변(論辨)한 것이다. 김병학(金炳學)의 서문(序文)과 김상현의 발(跋)이 있다.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열양(洌陽), 곧 한양(漢陽)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책.
활자본. 1책. 필사본으로 전해온 것을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경도잡지(京都雜志)>와 합본하여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1~12월까지 1년 동안의 행사와 풍속을 21항목으로 분류하여 기술한 내용으로, 주로 서울의 풍속을 다루었는데 <동국세시기>와 같이 연원(淵源)을 중국의 풍속에서 찾는다. 책 끝에 저자의 발문(跋文)이 있고 윤직(尹稷)이 교열하였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
조선 말기 김택영(金澤榮)이 편찬한 고문선집(古文選集). 11권 1책. 신활자본. 1921년 중국의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간행되었다.
고려와 조선의 대표적인 고문가 9인과 편자인 김택영까지 모두 10인의 대표적인 문장을 문체별로 한 두 편씩 선별하여 엮은 책이다. 원래 편자는 고려의 김부식(金富軾)과 이제현(李齊賢), 조선의 장유(張維), 이식(李植), 김창협(金昌協), 박지원(朴趾源), 홍석주 (洪奭周), 김매순(金邁淳), 이건창(李建昌)의 9인을 선정하였는데 원고 보관을 위촉받은 왕성순(王性淳)이 여기에 김택영을 자의로 추가하여 <여한십가문초>로 간행하였다.
편찬 목적은 중국인들에게 한국 한문학의 진면목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편자 자신이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문장가였던 관계로 국내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까지도 고문선집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편자는 사륙변려문(四六騈驪文)을 배격하여 최치원(崔致遠)을 탈락시키고 한국 최초의 고문가로 김부식을 들었으며,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에는 성리학(性理學)의 영향으로 유행한 주소어록체를 배격하여 이제현만 선발하고 이색(李穡)을 제외하였다. 또한 조선 중엽에 진한고문파(秦漢古文派)가 성행한 데 대해서도 불만을 품고 조선 중엽의 대표적 문장가인 차천로(車天路)와 최립을 제외하였다.
결국 편자는 당송고문파의 관점에서 고문가를 선발한 셈인데 그러다 보니 조선 말엽의 인물이 여섯 사람이 되었다. 이 같은 선발 기준에 대하여 많은 이의와 불만이 제기되기도 하였는데 고려 말의 대가인 이색이 빠진 것에 대하여 특히 논의가 분분하였다. 또한 성리학자인 조긍섭(曹兢燮)같은 사람은 최립이 빠진 문제를 놓고 편자인 김택영과 편지를 통해 논란을 벌리기도 하였다. 1977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본이 간행되었다.

3.작 품
여기에서는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에 실린 삼한의열녀전 서(三韓義烈女傳序)를 소개하기로 한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抄)> 권(卷) 9에 실려 있다.
《삼한의열녀전 서(三韓義烈女傳序)》
글을 짓는 체가 셋이 있으니, 첫째는 간단한 것이요, 둘째는 진실한 것이요, 셋째는 바른 것이다. 하늘을 말할 때 하늘이라고만 하고, 땅을 말할 때 땅이라고만 하는 것을 간단이라 하고, 나는 것은 물에 잠길 수 없고 검은 것은 희게 될 수 없는 이것을 진실이라 하고,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것을 바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마음의 미묘한 점은 글로써 드러내는 것이니, 글이라는 것은 자기 뜻을 드러내어 남에게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하게 말하여 부족하면 말을 번거롭게 하여 창달하고, 진실되게 말하여 부족하면 사물을 빌어 비유하며, 바르게 말을 하여 부족하면 뜻을 되돌려서 깨닫게 하니, 번거롭게 하여 창달하는 것은 그 속됨을 싫어하지 않으며, 빌어다 비유하는 것은 기이한 것을 싫어하지 않으며, 되돌려 깨닫게 하는 것은 격한 것을 병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 세 가지가 아니면 쓰임이 창달되지 않아 본체는 독립할 수 없는 것이다. 요(堯)가 말하기를,
“넘실거리는 홍수는 방금 큰 해가 되어 산을 안고 언덕에 올라 넓고 넓어서 하늘에 닿을 듯 하다”
하였으니, ‘아 저 홍수’라는 한 말이면 충분할 것을 이미 ‘넘실거린다’라 하고 또 크다니 넓다니 하였으니, 말로서는 넘쳤는데도 다시 손과 눈으로 돕고 있으니 또한 속되지 않은가? <시경(詩經)>에,

雖則七襄 직녀는 종일 일곱 필을 짠다지만,
不成報章 포백의 문채를 이루지는 못하누나.
彼牽牛 저 견우를 보면,
不以服箱 수레를 멍에 메워 끌지는 못하누나.
하였으니, 별이 베를 짜거나 수레를 몰지 못하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것이니, 이 어찌 기이한 말이 아닌가.
재여(宰予)가 상기(喪期)를 단축하려 하자 공자가,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여라.”
하였다. 재여에게 이 말을 옳다고 그대로 믿게 하여 그 상(喪)을 단축하였다면 어찌 되겠는가? 이것 역시 격동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삼대(三代 : 夏,殷,周) 이전은 순박함을 잃지 않았으며, 성인은 중화(中和)의 극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하면 문장이 이루어진다. 속된 것은 창달하는 데 적당하여 비설(鄙褻)한 데 흐르지 않으며, 신기한 것은 비유에 넉넉하여 탄궤(誕詭)에 빠지지 않으며, 격동시키는 것은 깨닫게 되기를 기약하고 집요하게 하나 어그러지는 데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소리에 비유하면 크게는 뇌성벽력으로부터 작게는 모기나 파리 소리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열거하여 셈하여 헤아리면 어찌 천 가지 만 가지에 그치겠는가? 선대(先代) 왕들이 음악을 만들 때 음은 다섯에 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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